짧은여정 긴호흡/답사가는날

경주외곽안강 -흥덕왕릉과 양동마을 독락당 정혜사지

부석사 2013. 1. 12. 17:28

2010년 9월 12일. 벌써 2년이 훨씬 넘은 시간이다.

지워질 기억은 엊그제도 해를 넘긴 시간인 듯하고, 설레는 기억은 2년이 지나도 그냥 얼마 전의 일인듯하다.

흥덕왕릉의 기억은 아마도 후자의 일일걸...

이날은 경주시내를 포항쪽으로 벗어나 안강지역의 양동마을, 흥덕왕릉, 독락당, 정혜사지13층석탑을 만났다. 이름만 들어도 오감은 벌써 작동한다.

 

 아직도 볼 릉이 많지만 내가 본 신라의 왕릉중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 흥덕왕릉이다. 왕릉중 비슷하기로는 괘릉이 가장 가까운데 두 왕릉의 주인이 조손사이라서 그런지도...

하지만 담장(이것도 현대에 둘러놨던 것)을 헐고 호~~방하게 트인 괘릉에 비하면 소나무숲에 안긴 흥덕왕릉의 운치는 비할 수가 없다.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아서 양동마을 들른 후 이리저리 달리다 마을길, 논사이길로 들어서니 흥덕왕릉 패널이 소나무숲앞에 있다. 주차장도 아주 소박하게 빈 자리에 아무데나...

 그 안에 들어서면 세상은 뿅~ 바뀌어서 소나무댄서들의 춤사위가 펼쳐진다. 한 그루도 똑바로 선 나무가 없고, 한 그루도 똑같은 자세를 잡은 나무가 없다. 어쩌면 저렇게도 자유롭게 댄스파티를 벌일 수 있는지...이끄미 샘은 이 나무들이 <삡빠빠 룰라...>춤을 추고 있다고 하셨다. ㅋㅋㅋ

 사람들은 배리 삼릉의 소나무숲이 멋지다고 하지만 운치로나 자태로나 이 소나무숲이 더 윗자리에 있지 싶다. 사진작가들사이엔 꽤 알려진 출사지인지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들어와 굴뚝만한 카메라를 들고 포인또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안개나 저녁안개 내릴때의 이 곳을 상상하며 흥덕왕의 시대, 흥덕왕의 순애보에 대해서 얘기한다.  

 소나무숲이 끝나는 귀부 근처에서 <흥덕>이라는 비편이 발견되어 이 릉이 흥덕왕릉임이 증명됐으며 괘릉처럼 문인석과 무인석이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러모로 괘릉과 많이 닮은 양식인데 석상의 모습도 서역인으로 묘사되었다.

 신라는 혜공왕이후 하대로 분류되는 데 흥덕왕(42대)시대는 그 중 하대의 전성기로 청해진이 설치돼 장보고가 활동한 시기이다.

 이 시기 왕의 계보를 보니 재미있는데 원성왕의 태자 인겸이 일찍 죽자 둘째아들 소성왕(39),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40)이 왕의 계보를 이어 갔는데 삼촌인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헌덕왕이 후손없이 죽자 동생인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인 장화왕후는 형인 소성왕의 딸이자 애장왕과 남매니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신라시대는 이런 일이 허다하니 이상할 일은 아니로세.

  왕에게는 언제나 여인이 끊이지 않으니 심금을 울리는 로맨스를 찾기가 힘든데 여기 흥덕왕의 순애보는 애잔하다. 즉위년에 장화왕후가 죽었는데 자신이 죽을때까지도(60에 승하함) 잊지 못하다가 먼저 장화황후의 릉으로 조성된 이 곳에 같이 합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릉은 신라왕릉  기록으로 전하는 유일한 합장릉이 된다.

 흥덕왕의 순애보와 비온 뒤의 흐릿함이 소나무숲과 어우러져 답사는 절정에 이른다.

 

  아~~ 이 정도로 허접한 댄서들이 아닌데...

 어제 내린 d7000님을 모시고 한 번 더 gogo....할 날을 기다리며

 

 

 

 

 이 댄소(댄스하는소나무)숲을 벗어나니 확~트인 릉이 나타났다.

 릉은 십이지신상을 둘렀고 난간(아~ 이거 전문용어가 있었는데)석이 릉은 호위하고 있다.

 릉에서 본 석상과 댄소쪽

 예쁘게 벌초한 틈으로 무릇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듣는 사람 듣고 읽는 사람 읽고 감상하는 사람 감상하고, 찍는 사람 찍고!

 문인석. 괘릉의 문인석과 닮긴 했지만 많이 약해졌다.

 무인석도 힘이 빠졌다. 그 새 많이 늙으셨나부다...

 12지신상 중 쥐님. 내 나이의 띠라 항상 찾아가면 언제나 무덤 뒤쪽에 그늘진 구석에 있어 표정잡기가 힘들다. 그도 그럴것이 정오(正午)를 가리키는 반대쪽에 자정(子正,자시의 한가운데)가 있기 때문이다.

 괘릉에는 문인무인석상곁에 사자상이 있는데 여기엔 릉 앞에 있다. 뚱그런 눈, 꽉 다문 입속의 이빨, 숱많은 수염이 무섭다?  이그 하나도 안무서워~~

 곱슬곱슬 갈귀는 어느 솜씨좋은 석공이 다듬었는데 천년이 지나도 풀림없이 여전하고 꽃핀 똥꼬에서 나오는 똥도 꽃똥이 나올 듯...

 다듬다 말았는지, 망가뜨렸는지 사연을 알 수 없는 귀부가 입구에 말못하고 서 있다. 크기로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비에 버금가는 완죤 대형급이다.

 

 

답사가기 두어달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

이 소식의 김이 막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날이니 탐방객들이 버글버글하다. 밀려드는 사람들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드나드는 길, 주차시설, 먹거리를 해결할 식당이 아쉬운 시간이었다.

 아...특히 가정식식당은 답날중 최악이었다. 밀려드는 손님을 받기 위해 쓰지않던 아래채까지도 달랑 상 하나 놓았는데 비온 뒤에 습기가 온 몸을 휘감고 도는지라 도저히 앉아 있기가 힘들어 뛰쳐나와야 했다. 지금은 그럴 듯한 밥집들도 많이 들어섰으리라 기대한다.

 

 양동마을의 가문은 크게 두 개의 성씨들로 구성되어 있다. 류복하(역시 혼인하여 처가에 들어왔음)라는 분의 무남독녀와 혼인하면서 역시 처가에서 살게 된 손소(청양에서 이주)라는 분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손씨가문이 있고. 이번이라는 사람이 손소의 딸과 혼인하여 이씨가문도 번성한다.(그래서 양동마을인가?) 이 두사람의 아들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동방5인중 한 명인 이언적이다.

 그러니까 양동마을의 손씨는 류씨의 외손이고  이씨는 손씨의 외손들인 셈이다. 그래서 따로 외손마을이라 불린다고도 하단다.

양동마을에서 손씨의 종가는 서백당이고 이씨의 종가는 무첨당이다.

 

우리의 답사코스는 정보센터에서 출발해 서백당과 주변 건물→ 더 깊숙히 들어가 고개너머에서 →무첨당쪽으로 방햐을 틀어 무첨당보고 수졸당으로 내려와 →  향단→관가정 본 후→건너편 심수정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하였다. 

 개울을 끼고 서백당쪽으로 가면서 본 향단쪽 풍경.

 

양민당 손소의 서백당(書百堂). 하루에 참을 인자를 백번쓴다는 뜻이란다.

양동마을 월성손씨의 종가. 중앙의 작은 담장은 내외담이라고 불리는 안채와 사랑채를 형식적으로나마 구분하는 경계로 쓰인다.

 안채의 지붕선 

 서배당의 아름드리 향나무. 집의 연륜을 말해준다.

 안에 어르신이 계신지 신발한켤레가...그래서 조용히....

엇! 축담돌이 탑의 부재인듯한데...

 

 여긴 무첨당(無添堂).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회재 이언적의 손자 이의윤의 호이기도하다. 보통은 사랑채가 안쪽에 있는 데 이 곳은 대문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살림집은 바로 옆에 따라 있고 사당이 뒤쪽으로 계단위에 있다. 지붕선이 하늘로 치솟은 모양새가 찌를 듯하다.

 

 여긴 향단(香壇). 들머리에 향나무가 있어 이렇게 부른다. 이언적이 동생에게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향단에서 충격을 먹었다. 밖에서 보는 개방적인 모습과는 달리 안채의 좁음과 폐쇄성에 할 말이 없어졌다.일단 현재 사람이 살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문살너머로 보이는 안채는 어디 도망갈(?) 곳이 없는 듯했다. 좁은 마당은 구슬치기 하기도 힘들 넓이요, 비온 뒤끝이라 그 눅눅함이 더해 보였다. 심지어 아들이 부인의 방으로 가려면  시어머니방을 지나가야하니 그 조심스러과 기가 찬 구조란.....

 문살틈으로 본 안채의 마당. 여긴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빈 절구통에 빗물만 가득하다.

 

 

 관가정(觀稼亭).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본 다는 뜻이란다.

손소의 손자 손중돈이 분가한 집.

 여기에 서면 손씨 집안의 논에서 농사짓는 모습들이 눈에 다 들어오니 직역한 뜻이 더 맞을듯...(실제로 보이는 건너 들판이 모두 손씨집 소유였다고 한다.)

 관가정은 지금 사람이 살지 않아 관람객들의 출입이 가능하다. 여기도 생각보다 좁긴 한데 향단의 안채에 비하면 운동장급.

마지막으로 심수정에서 아까 둘러본 동선을 따라 한번더 눈여행을 한다.

 

 

이제 독락당(獨樂堂).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지은 집.

4대 사화에 휘말린 시절, 낙향해 홀로 즐거움을 만들며 살다가 평안도 강계로 유배가 7년후 생을 마감했다(1553년)...

 양동마을의 이언적 후손은 본부인(적자 이응인)의 후손들이고 여기 독락당은 40살에 벼슬에서 쫓겨나 둘째부인과 서자(이응전)와 살며 학문을 몰두하던 곳이다. 그래서 이언적이 혈통은 무첨당에 학문은 독락당에 남겼다고 한다.

 이언적은 큰 아들인데도 벼슬하는 형을 대신해 동생인 이언괄이 모친을 봉양했다. 그 마음을 빚을 갚고자 함인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때 동생에게 99칸짜지 향단을, 적자게겐 무첨당을 지어주었다. 마음은 서자에게 있었는지 유배생활과 시신운구, 학문을 알리는 일은 서자 이응전이 했다고 한다.

 

 살림집이라 외부인 출입금지(그냥 탐방객이 아니라 역사답사인들이라고 사정해도 거절)로 안건물은 구경못하고 바깥으로 돌아 내에서 독락당과 구멍난 틈으로 안쪽을 잠시 엿보고 정혜사지 13층석탑을 보고 옥산서원까지 둘러봤다.

 

 독락당을 보러가는 흙담길

 

 일부는 계곡의 자연석을 주춧돌삼아 자연을 정자안으로 끌어넣었다.

 비 온뒤라 냇물이 건널 수 없을 만큼 불었다.

 

 

 

독락당에서 5분거리에 있는 정혜사지13층석탑(국보 40호)

정혜사는 통일신라 선덕왕때 당나라승려 백우경이 망명하여 지은 절이라고 전한다. 조선중기까지는 절이 존재했으나 그 이후 폐사된 듯하단다.

 13층이라 꽤나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붕돌만 차곡차곡 쌓은 형태라 석가탑정도의 높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13층이라는 높이와 기단부 4방에 감실이 있는 등으로 이 탑은 이형탑에 속한단다. 

 우리가 다녀간 다음해 기단부까지 올라와 있던 흙단이 파내고 원래대로 다시 단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아직 배롱나무꽃이 다 지지는 않은 9월 어느날

 

 

 각자 흩어져 여기저기 보고싶은 곳에서 열심히 살피는 중.

 

 지금은 이 흙들이 파헤져지고 두 단의 흙단으로 복원됐단. 이 모습이 잘못 된 거란다.

 

 

이제 마지막 답사지 이언적의 옥산서원

독락당에서 아래로 더 내려와 서원으로 가는 용소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재미있는 다리다.

 

 

 옥산서원은 동방5현(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라 불리는 이언적을 기리는 서원이다.

울나라 5대 서원(소수, 도동, 병산, 도산 옥산)에도 속한다.

 저 옥산서원 글씨는 추사의 글씨.

 

 

왼쪽엔 문화해설사를 따라온 사람들. 오른쪽은 가족. 우리는 구인당(본건물)에 앉아 앞트임 구경중.

아...근데 너무 막혔다. 향단도 막혔고 여기도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