崇福寺碑
有唐新羅國 初月山 大崇福寺 碑銘 幷序
臣聞, 王者之基祖德, 而峻孫謀也, 政以仁爲本, 禮以孝爲先, 仁以推濟衆之誠, 孝以擧尊親之典, 莫不體無偏於夏範, 遵不匱於周詩. 聿修芟秕稗之譏, 克祀潔蘋蘩之薦, 俾慧渥均濡於庶彙, 德馨高達於穹旻. 然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享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 是知敦睦九親, 實在紹隆三寶. 矧乃玉毫光所照燭, 金口偈所流轉, 靡私於西土生靈, 先及於東方世界, 則我太平勝地也, 性滋柔順, 氣合發生. 山林多靜黙之徒, 以仁會友, 江海協朝宗之欲, 從善如流. 是故, 激揚君子之風, 薰漬梵王之道, 猶若泥從璽金在鎔, 而得君臣鏡志於三歸, 士庶翹誠於六度. 至乃國城無惜, 能令塔廟相望, 雖在贍部洲海邊, 寧慚都史多天. 衆妙之妙, 何名可名.
金城之离, 日觀之麓, 有伽藍號崇福者, 乃先朝嗣位之初載, 奉爲烈祖元聖大王園陵, 追福之所修建也. 粵若稽古寺之濫觴, 審新刹之覆簣, 則昔波珍飡金元良者, 炤文王后之元舅, 肅貞王后之外祖也, 身雖貴公子, 心實眞古人, 始則謝安縱賞於東山, 儼作歌堂舞館, 終乃慧遠同期於西境, 捨爲像殿經臺, 當年之鳳管鵾絃, 此日之金鍾玉磬, 隨時變改, 出世因緣. 寺之所枕倚也, 巖有鵠狀, 仍爲戶牓. 能使鴦廬長價, 永令鵝殿增輝, 則彼波羅越之標形, 崛恡遮之紀號, 詎若飛千里以取譬, 變雙林以刱題者哉. 但玆地也, 威卑鷲頭, 德峻龍耳, 與畵金界, 宜闓玉田.
洎貞元戊寅年冬, 遺敎窀穸之事, 因山是命, 擇地尤難, 乃指淨居, 將安秘殿. 時獻疑者有言, 昔游氏之廟, 孔子之宅, 猶皆不忍終毁, 人到于今稱之, 則欲請奪金地, 無乃負須達陁大捨之心乎. 冥葬者, 地所祐天所咎, 不相補矣. 而莅政者譏曰, 梵廟也者, 所居必化, 無辶不諧, 故能轉禍基爲福場, 百億劫濟其危俗, 靈隧也者, 頫石全坤脈, 仰揆乾心, 必在苞四象于九原, 千萬代保其餘慶, 則也. 法無住相, 禮有盛期, 易地而居, 順天之理. 但得靑烏善視, 豈令白馬悲嘶. 且驗是仁祠, 本隸戚里, 誠宜去卑就峻, 捨舊謀新. 使幽庭據海域之雄, 淨刹擅雲泉之媺, 則我王室之福山高峙, 彼侯門之德海安流. 斯可謂知無不爲, 各得其所, 豈與夫鄭子産之小惠, 魯恭王之中轍, 同日而是非哉. 宜聞龜筮協從, 可見龍神歡喜. 遂遷精舍, 爰創玄宮, 兩役庀徒, 百工蕆事. 其改創紺宇, 則有緣之衆, 相率而來, 張袂不風, 植錐無地, 霧市奔趍於五里, 雪山和會於一時. 至於撤瓦抽椽, 奉經戴像, 迭相授受, 競以誠成, 役夫之走步未移, 釋子之宴居已就. 其成九原, 則雖云王土, 且非公田. 於是括以邇封, 求之善價, 益丘壟餘武百結, 酬稻穀合二千苫 斞除一斗爲苫, 十六斗爲斞. 旋命所司與王官之邑, 共芟榛徑, 分蒔松埏, 故得蕭蕭多悲風, 激舞鳳歌鸞之思, 鬱鬱見白日, 助盤龍踞虎之威. 且觀其地, 壤異瑕丘, 境連暘谷. 祇樹之餘香未泯, 穀林之佳氣增濃, 繡峯則四遠相朝, 練浦則一條在望, 實謂喬山孕秀, 畢陌標奇. 而使金枝益茂於鷄林, 玉派增深於鰈水者矣. 初寺宇之徙也, 雖同湧出, 未若化城, 哉得剗荊棘而認岡巒, 雜茅茨而避風雨. 僅踰六紀, 驟歷九朝, 而累値顚覆, 未遑崇飾, 三利之勝緣有待, 千齡之寶運無虧.
伏惟, 先大王, 虹渚騰輝, 鼇岑降跡, 始馳名於玉鹿, 別振風流, 俄綰職於金貂, 肅淸海俗. 據龍田而種德, 捿鳳沼以沃心, 發言則仁者安人, 謀政乃導之以道. 八柄之重權咸擧, 四維之墜緖斯張, 歷試諸難, 利有攸왕. 旋屬憂侵杞國, 位曠搖山, 雖非逐鹿之原, 亦有集烏之苑. 然以賢以順, 且長且仁, 爲民所推, 捨我奚適. 乃安身代邸, 注意慈門, 慮致祖羞, 願興佛事. 因請芬皇寺僧崇昌, 以修奉梵居之地, 白于佛, 復遣金純行, 以隆宣祖業之誠, 告于墓, 詩所謂, 愷悌君子, 求福不冂, 書所謂, 上帝時歆, 下民祇協. 故能至誠冥應, 善欲克終, 卿士大夫與守龜協, 赫赫東國而君臨之. 爰遣陪臣, 告終稱嗣. 遂於咸通六年, 天子使攝御史中丞胡歸厚, 以我鄕人前進士裵匡, 腰魚頂豸爲輔行, 與王人田獻銛來. 錫命曰, 自光膺嗣續, 克奉聲猷, 俾彰善繼之名, 允協至公之擧, 是用命爾爲新羅國王. 仍授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 向非變齊標秀, 至魯騰芬, 則何以致飛鳳筆而寵外諸侯, 降龍旌而假大司馬之如是矣. 亦旣榮沾聖澤, 必將親拜靈丘, 肆以備千乘之行, 奚翅耗十家之産.
遂命太弟相國 尊諡惠成大王, 致齋淸廟, 代謁玄扃. 懿乎. 鷄樹揚蕤, 鴒原挺茂. 歲久而永懷耕象, 時和而罷問喘牛. 藻野縟川, 觀者如雲. 迺有鮐背之叟, 鵠眉之僧, 抃手相慶, 大相賀曰, 貴介弟之是行也, 聖帝之恩光著矣, 吾君之孝理成焉. 禮義鄕風, 綽有餘裕, 遂使海波晏, 塞塵淸, 天吏均, 地財羨, 則乃踵修蓮宇, 威護栢城, 今也其時, 捨之何俟. 於是, 孝誠旁達, 思夢相符. 迺見聖祖大王, 撫而告曰, 余而祖也, 而欲建佛像, 飾護予陵域, 小心翼翼, 經始勿亟. 佛之德, 予之力, 庇爾躳, 允執厥中, 天祿永終. 旣以韻耿銅壺, 形開玉寢, 不占十煇, 若佩九齡. 遽命有司, 虔修法會, 華嚴大德釋決言, 承旨於當寺, 講經五日, 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仍下敎曰, 不愛其親, 經所戒也, 無念爾祖, 詩寧忘乎. 睠言在藩, 有欲修寺, 魂交致感, 㾕慓襟靈. 旣愧三年不飛, 深思一日必葺, 百尹御史, 謂利害何. 雖保無賣兒貼婦之譏, 或慮有鬼怨人勞之說. 獻可替否, 爾無忽諸. 宗臣繼宗勛榮以下, 協議上言曰, 妙願感神, 慈靈現夢, 誠因君志先定, 果見衆謀僉同, 是寺也成 九族多慶. 幸値農隙, 請興杍工.
爰用擇人龍於建禮仙門, 擧僧象於昭玄精署, 乃命宗室三良 曰端元毓榮裕榮, 與釋門二傑 曰賢諒神解, 及贊導僧崇昌, 督其事. 且國君爲檀越, 邦彦爲司存, 力旣有餘, 心能匪懈. 將俾小加大, 豈宜新間舊. 然恐沮檀溪宿願, 不瑕傷㮈苑前功, 選掇故材, 就遷高土庶. 於是占星揆日, 廣拓宏規, 合土範金, 爭呈妙技. 雲梯而倕材架險, 霜途而獿 堊黏香, 屬嵒麓而培垣, 壓溪流而敞戶, 易荒土皆而釦砌, 變卑廡而琱廊. 複殿龍盤, 中以盧舍那爲主, 層樓鳳跱, 上以修多羅爲名. 高設鯨桴, 對標鸞檻. 綺井華攢而革甲鞢, 繡栭枝擁以杈枒, 聳翼如飛, 廻眸必眩. 其以增崇改作者, 有若睟容別室, 圓頂蓮房, 揣食臑堂, 晨炊广舍. 加以雕礱罄巧, 彩雘窮精, 巖洞共淸, 煙霞相煥. 玉刹掛蓬溟之月, 兩朶霜蓮, 金鈴激松澗之風, 四時天樂. 就觀勝槩, 傑出遐陬. 左峯巒則鷄足挐雲, 右原隰則龍鱗閃日. 前臨則黛列鯷嶠, 後睇則鉤連鳳崗. 故得遠而望也, 峭而奇, 追而察也, 爽而麗, 則可謂樂浪仙境, 眞是樂邦, 初月名山, 便爲初地.
善建而事能周匝, 勤修而福不唐捐, 必謂大庇仁方, 上資寶壽. 罩三千界爲四境, 籌五百歲爲一春, 豈期獵豹樊岑, 方歡竪尾, 跨龍荊峀, 遽泣墮髥. 獻康大王, 德峻妙齡, 神淸遠體. 仰痛於寢門問竪, 俯遵於翌室宅宗, 滕文公盡禮居憂, 終能克己, 楚莊王俟時修政, 其實驚人. 矧復性襲華風, 躳滋慧露, 抗尊祖之義, 激歸佛之誠.
中和乙巳年秋, 敎曰, 善繼其志, 善述其事, 永錫爾類, 在我而已. 先朝所建鵠寺, 宜易牓爲大崇福. 其持經開士, 提綱淨吏, 南畝以資供施, 一依奉恩故事 奉恩寺乃聖悳大王追福建寺, 其故波珍飡金元良所捨地利, 輸轉非輕, 宜委正法司. 別選二宿德, 編籍爲常住, 薦祉于冥路, 則有以見居上位者, 无幽不察, 結大緣者, 有感必通. 自是鳧鍾吼泬寥, 龍鉢飫香積. 唱導則六時玉振, 修持則萬劫珠聯. 偉矣哉. 得非尼父所謂無憂者, 其惟文王乎, 父作之, 子述之者耶.
慶曆景午年春, 顧謂下臣曰, 禮不云乎, 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 先朝締搆之初, 發大誓願, 金純行與若父肩逸, 嘗從事於斯矣. 銘壹稱而上下皆得, 爾宜譔銘. 臣也, 浪跡星槎, 偸香月桂, 虞丘永慟, 季路徒榮, 承命震驚, 撫躬悲咽. 窃思西宦日, 嘗覽柳氏子珪, 錄東國之筆, 所述政條, 莫非王道, 今讀鄕史, 宛是聖祖大王朝事蹟. 抑又流聞, 漢使胡公歸厚之復命也, 飽採風謠, 白時相曰, 自愚已往, 出山西者, 不宜使海東矣. 何則, 鷄林多佳山水, 東王詩以印之而爲贈, 賴愚嘗學, 爲綴韻語, 强忍愧酉守之, 不爾爲海外笑必矣. 君子以爲知言. 是惟烈祖以四術開基, 先王以六經化俗, 豈非貽厥之力. 能得換乎其文, 則銘無愧辭, 筆有餘勇.
遂敢窺天酌海, 始緝凡詞, 誰知墜月摧峯, 俄興永恨. 旋遇定康大王, 功成遺礪, 韻叶吹篪. 旣嗣守丕圖, 將繼成遺績, 無安厥位, 未喪其文. 而遠逐日弟兄, 據値西山之影, 高憑月姉妹, 永流東海之光. 伏惟 大王殿下, 瓊萼聯芳, 璇源激爽, 體英坤德, 纘懿天倫. 諒所謂, 懷神珠, 鍊彩石, 有虧皆補, 無善不修. 故得寶雨金言, 焯然授記, 大雲玉偈, 宛若合符. 且以文考成佛宮, 康王施僧供, 已峻琉璃之界, 未刊琬琰之詞, 申命瑣材, 俾搖柔翰, 臣雖池慚變墨, 而筆忝夢椽, 窃比張融, 不恨無二王之法, 庶幾曹操, 或解有八字之褒. 設使灰撲塡池, 塵飛漲海, 本枝蔚矣, 齊若木以長榮, 豊石巍然, 對沃焦而卓立.
齋誠拜手, 抆涕援毫, 追蹤華而獻銘曰,
迦衛慈王, 嵎夷太陽. 顯于西土, 出自東方.
無遠不照, 有緣者昌. 功崇淨刹, 福蔭冥藏.
烈烈英祖, 德符命禹. 納于大麓, 奄有下土.
保我子孫, 爲民父母. 根深桃野, 派遠桑浦.
蜃紼龍輴, 山園保眞. 幽堂闢隧, 踊塔遷隣.
萬歲哀禮, 千生淨因. 金田厚利, 玉葉長春.
孝孫淵懿, 昭感天地. 鳳翥龍躍, 金圭合瑞.
乞靈不昧, 徼福斯至. 欲報之德, 剋隆法事.
妙選邦傑, 嚴敦國工. 對農之隙, 成佛之宮.
彩檻攢鳳, 雕樑架紅. 繚墉雲矗, 繢壁霞融.
盤基爽塏, 觸境蕭灑. 藍峀交聳, 蘭泉迸瀉.
花娓春巖, 月高秋夜. 雖居海外, 獨秀天下.
陳耕報德, 隋號興國. 孰與家福, 崇之國力.
堂聒妙音, 廚豊淨食. 嗣君遺化, 萬劫無極.
於鑠媧后, 情敦孝友. 致媺雁行, 愼徽龍首.
詞恧腐毫, 書慙掣肘. 鰌壑雖渴, 龜珉不朽.
□□□手 桓蠲等刻
<判讀文>
有唐新羅國 初月山 大崇福寺의 碑銘과 幷序
<崔致遠 지음>
신이 듣건데 “왕자가 祖宗의 덕을 기본으로 하여 후손을 위한 계책을 중엄히 할 때, 정치는 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禮敎는 효로써 으뜸을 삼는다” 하오니 인으로써 대중을 구제하려는 정성을 드러내고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모범을 드높여 洪範에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詩經에서 ‘효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드는데 빈천과 같은 풀이라도 정결히 올림으로써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며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애를 쓰면서 더위먹은 백성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죄인을 보고 우는 것이 어찌 중생을 크게 미혹한 데서 건져주는 것만 하겠으며, 힘을 다하여 조상을 하늘과 上帝와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어찌 높으신 혼령을 항상 즐거운 곳에 모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에 조상과 후손의 돈독하고 화목함이 실로 三寶를 계승하여 높이는데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물며 玉毫의 빛이 비치고 부처님의 입에서 게송이 나오는 것이 인도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동방세계에도 미쳤으니, 우리 태평한 勝地는 성질은 유순함을 낳고 기운은 만물을 생하는데 적합합니다. 산과 숲에는 고요하게 수도하는 무리들이 많아 仁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고자 함을 좇아 착함을 따르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風度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되는 것이 마치 진흙이 도장을 따르고 쇠가 용광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君臣이 三歸에 뜻을 밝히고 士庶가 六度에 정성을 기울이며 나아가 國都에까지 아낌이 없어 탑이 즐비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膽部州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도솔천에 부끄러우리요. 못 미묘한 것 가운데 미묘한 것은 무슨 말로써 나타내겠습니까.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崇福寺라는 절이 있사오니 이 절은 곧 先代王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첫해에 烈祖 元聖大王의 능을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옛절이 생긴 기원을 상고하고 새 절이 이룩된 것을 살펴보건대, 옛날 파진찬 金元良은 炤文王后의 외숙이요 肅貞王后의 외조부로서, 몸은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참다운 옛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謝安이 東山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歌堂과 舞館을 어엿하게 짓더니 나중에는 慧遠이 여럿이 함께 西方淨土에 가기를 기약한 것처럼 그를 희사하여 佛殿과 經臺로 삼아, 예전에 피리 금슬 소리이던 것이 오늘날 金鐘 玉磬 소이가 되었으니 시절이 변함에 따라 고쳐진 것으로 俗界를 벗어난 인연이었습니다. 절의 의지가 되는 것은 바위의 고니 모양인데 그로 인해 절 이름을 삼았습니다. 좌우의 翼廊으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佛殿으로 하여금 길이 빛나게 하였으니, 저 波羅越의 형상과 崛恡遮의 이름으로 djWL 한 번에 천리를 나는 고니로써 비유하고 沙羅雙樹가 변한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과 같겠습니까. 다만 이 땅은 위세가 鷲頭山보다 낮고 地德이 龍耳보다 뫂으니 절을 짓느니보다는 마땅히 왕릉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貞元 무인년(798) 겨울에 (元聖大王께서) 장례에 대해 遺敎하시면서 因山을 명하셨는데 땅을 가리기가 더욱 어려워 이에 절을 지목하여 幽宅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의문을 가진 이가 말하기를, “옛날 子遊의 사당과 孔子의 집도 모두 차마 헐지 못하여 사람들이 지금껏 칭송하거늘 절을 빼앗으려는 것은 곧 須達多長者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지내는 것이란 땅으로서는 돕는 바이나 하늘로서는 허물하는 바이니 서로 補益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담당자가 비난하여 말하기를,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福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묘지에 四象을 포괄함으로써 천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불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는가. 또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왕의 인척에게 속하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雄麗한 곳이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뫂이 솟을 것이요 저 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이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음이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鄭나라 子産의 작은 은혜와 漢나라 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龍神이 기뻐함을 보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절을 옮기고 이에 왕릉을 營造하니 주 役事에 사람이 모여 온갖 匠人들이 일을 마쳤습니다.
절을 옮겨 세울 때에 인연있는 대중들이 서로 솔선하여 와서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여서 霧市가 五里까지 이어져 나오며, 雪山까지 이어선 사람들이 일시에 어울려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와를 거두고 서까래를 뽑으며 불경을 받들고 불상을 모시는데 번갈아 서로 주고받으며 다투어 정성으로 이루니, 인부가 분주히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스님들의 안식처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왕릉을 이루는데 비록 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하여 丘壟地 백여 결을 사서 보태었는데 값으로 치른 벼가 모두 이천 苦[斞에서 한 말을 제한 것이 苦이고 열여섯 말이 斞이다] 이었습니다. 곧 해당 관사와 畿內의 고을에 명하여 함께 길의 가시를 베어 없애고 나누어 墓域 둘레에 소나무를 옮겨 심으니, 쓸쓸하게 悲風이 잦으면 춤추던 봉황과 노래하던 난새의 생각이 커지지만 왕성한 기운으로 밝은 해가 드러나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한 地勢의 위엄을 더해 줍니다.
그곳을 보니 땅은 瑕丘와 다르나 경계는 暘谷에 맞닿아 있습니다. 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穀林의 아름다운 기운이 더욱 무르녹아, 비단길은 봉우리는 사방 멀리에서 朝謁하는 것 같고 누인 명주같은 개펄은 한 가닥으로 눈 앞에 바라보이니, 실로 喬山이 빼어남을 지니며 畢陌이 기이함을 나타냈다고 할 것인 바, 왕손들이 계림에서 더욱 무성하게 하고 또 신라에서 더욱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입니다.
처음 절을 옮김에 있어 비록 보탑이 솟아나오듯 빠르긴 했으나 아직 절다운 모양을 갖추지는 못하여 가시덤불을 제거하고서야 언덕과 산을 구별할 수 있었고 지붕에 띠를 섞고서야 비바람을 비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70여 년을 넘긴 사이 갑작스럽게 아홉 왕이나 바뀌어 여러 번 전복을 당하여 미처 꾸밀 겨를이 없었는데 景文大王의 뛰어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천 년의 寶運이 이그러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先代王께서는 무지개같은 별이 華渚에 빛을 떨치듯이 贛山에 자취를 내리시어 처음 玉鹿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화랑의 기풍을 특별히 떨치시더니 얼마 뒤엔 높은 지위에서 모든 관직을 통섭하시고 궁벽한 나라의 습속을 바로잡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임금 될 자리에서 덕을 심으시며 대궐안에 살면서 마음을 계발하셨으니 말씀을 하면 곧 어진이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었고 정치를 도모하면 곧 도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가지의 중요한 權柄을 모두 일으키고 禮義廉恥의 떨어진 실마리를 이에 신장시키며 여러 난관을 차례로 겪었지만 이로움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있어 나라에 우환이 생겨 왕위가 비어 산이 흔들리는 듯한데 비록 왕위각축의 양상은 없었지만 간혹 까마귀처럼 모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질며 유순함으로써 임하였고 노성함과 인자함을 지녀 백성들의 추승하는 바가 되었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代邸에서 몸을 편히 하고 慈門에 뜻을 기울이며 祖宗에게 부끄러움이 될까하여 佛事 일으키기를 발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분황사의 僧 崇昌 에게 청하여 절을 중수하여 받들겠노라는 뜻을 부처님께 고하며 다시 金純行을 보내어 祖業을 높이 펼치겠노라는 誠心을 사당에 고하도록 하셨으니, 『詩經』에 이른바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여! 복을 구함이 그릇되지 않도다”라고 한 것이요 『書經』에 으른바 “上帝가 이에 흠향하시어 아래 백성이 공경하며 따른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지극한 정성이 가만히 감응되고 좋은 욕망이 잘 이루어졌으며 公卿 士大夫의 뜻이 점괘와 더불어 합치되었으니 동국을 빛나게 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이에 신하를 (당나라에) 보내어 (憲安王의) 돌아가심을 고하고 (今上의) 嗣位하심을 아뢰게 하였더니, 드디어 感通 6년(865)에 天子께서 攝御史中丞 胡歸厚에게 우리나라 사람으로 前 進士였던 裵匡의 허리에 魚袋를 두르고 머리에 豸冠을 쓰게 하여 副使로 삼아 王使 田獻銛과 함께 와서 칙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영광스럽게 寶位를 이어받음으로부터 훌륭한 계책을 잘 받들어 잘 계승하는 이름을 드날리고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推擧에 부응하였으니 이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왕으로 삼노라”고 하고는 이에 檢校太尉 兼 持節充寧海軍使의 직함을 내렸으니, 지난날에 齊나라와 같은 것을 변화시켜 빼어남을 나타내고 魯나라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향내를 드날리지 못했다면 천자께서 어찌하여 조서를 보내 外域의 제후를 총애하고 龍을 그린 旗를 내려 大司馬에 假攝함이 이와 같았겠습니까. 또한 이미 천자의 恩澤에 영광스럽게 젖었으니 반드시 장차 몸소 先王의 능에 참배할 때 임금의 행차를 준비하였으나 어찌 많은 비용을 소모하겠습니까.
드디어 宰相인 太弟[시호를 높여 惠成大王이라 함]에게 명하여 宗廟에 齋를 올리게 하고 대신하여 陵에 拜謁토록 하셨으니, 아름답구나! 왕족들의 훌륭함이 드날리고 형제들의 무성함이 빼어났도다. 풍년이 오래 계속되니 길이 밭가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고 시절이 화평하니 재상으로서 소가 헐떡이는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구나. 들을 꾸미고 시내를 채색하니 보는 사람이 구름과 같도다. 이에 반점 생긴 늙은이와 흰 눈썹의 스님이 있어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하례하여 말하기를, “귀하신 王弟의 이번 행차로 거룩하신 천자의 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성이 이루어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의와 풍속이 침착하고 유연하여, 마침내 바닷 물결이 잠잠하고 변방의 풍진이 깨끗하며 사철이 고르고 땅의 산물이 불어나게 되어 선대를 이어 절을 중수하고 능을 잘 호위하시니 바로 지금이 그 기회인즉 이때를 버리고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효성이 두루 사무치고 생각이 꿈과 부합하게 되었으니, 곧 (꿈에) 聖祖 元聖大王을 뵈온즉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니라.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陵域을 꾸며 호위하고자 하는데, 조심하고 삼갈 것이며 일을 서두르지 말라 부처님과 덕이 나의 힘이 네 몸을 감싸줄 것이니 진실로 중도를 잡아 하늘이 주는 복록을 길이 마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銅壺에서 맑은 소리가 나고 玉寢에서 깨어나셨는데 열가지 햇무리로 길흉을 점치지 않아도 꿈에서 일러준 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급히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회를 경건하게 베풀도록 하여 華嚴大德인 快言이 이 절에서 王旨를 받들어 닷새 동안 불경을 講하였으니 효성스러운 생각을 아뢰고 冥福을 드리려는 바이었습니다. 이에 下敎하시기를,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경전에서 경계하는 바이다. ‘네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랴’ 고 하는 詩를 어찌 잊겠는가. 돌보아주심이 藩邦에 있는 데다 절을 중수하고자 할진대 혼과 통하여 감응이 이루어지니 송구함이 가득차 마음이 떨리는구나. 이미 삼년동안 세월만 보낸 것은 부끄럽지만 ‘비록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집을 수리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였는데 百尹과 御事는 利害가 어떻다고 하느냐. 비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잡혔다’는 비방이 없음을 보장하겠으나 혹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있을까 염려된다. 옳은 것을 권하고 그른 것을 못하도록 하여 그대들은 소흘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宗臣인 繼宗과 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아뢰기를, “妙願이 神明을 감동시켜 자애로운 祖靈께서 꿈에 나타나셨는바 진실로 왕의 뜻이 먼저 정해짐으로 인하여 과연 衆議가 모두 같은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 절이 이루어지면 구친에게 기쁜일이 많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사철이 아닌 때를 당하였으니 청컨대 목공 일을 일으키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建禮仙門에서 걸출한 인재를 가리고 昭玄精署에서 고매한 스님을 기용하여 종실의 세 어진이인 端元 ▲榮 裕榮과 불문의 두 호걸인 賢諒 神解 그리고 贊導僧인 崇昌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또 임금에게 시주가 되시고 나라의 선비들이 담당자가 되었으니 힘이 이미 넉넉하고 마음도 능히 게으로지 않았습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만들려 하는데 어찌 새것에 옛것을 뒤섞어서야 되리오마는 그러나 檀溪의 오랜 소원을 저버릴까 두렵고 㮈苑의 前功을 손상하지 않으려 옛 재목을 골라 모아 높게 다진 터로 옮겼습니다. 이제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서 넓게 개척하여 규모를 크게 하였으며 진흙을 이기고 쇠를 녹여 부어 다투어 묘기를 나타냈습니다. 구름사다리는 倕와 같은 솜씨로 다듬은 재목을 험한 데에 건너지르고 서리같은 塗壁은 獿와 같은 재주로 만든 색흙에 향을 이겨 넣으며, 바위로 된 기슭을 깎아 담을 돋우고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앞이 탇 트이게 창을 내며, 거친 층계를 금테두른 섬돌로 바꾸고 보잘 것 없는 곁채를 무늬새긴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겹으로 된 불전은 용이 서린 듯한데 가운데에 盧舍那佛을 주인으로 모셨으며, 층층누각엔 봉황이 우뚝 섰는데 위에다 修多羅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고래등같은 마룻대를 높이 설비하고 난새같은 난간을 마주보게 하며, 비단같은 천장엔 꽃을 포개었고 수놓은 주두엔 곁가지를 끼우니 날개를 솟구쳐 날아갈 듯하여 볼 때마다 눈이 아찔하도다. 그밖에 더 높이고 교쳐 지은 것으로는 초상화를 모신 별실과 스님들이 거처할 요사며 음식을 헤아리는 식당과 밥을 짓는 넓은 부엌이었습니다. 더욱 새기고 다듬는데 교묘함을 다하고 채색하는데 정밀함을 다하였스니 巖穴과 골짜기가 함께 맑으며 안개와 노을이 서로 빛나도다. 玉刹竿에 蓬溟의 달이 걸렸으니 두 떨기 서리같은 연꽃이요 금방울에 松澗의 바람이 부딪치니 사철의 천연 음악이로다.
絶勝 景槪를 보면 외딴 구석에서 걸출하였으니 왼편의 뾰족한 봉우리들은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듯하고 오른편의 습한 들은 용의 비늘이 태양에 번쩍이는 것 같도다. 앞에 나가면 메기같은 산이 검푸르게 벌려있고 뒤로 돌아보면 봉황같은 산등성이가 잇닿아 있도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높고 기이하고 가까이 가서 살피면 상쾌하고 아름다우니 가히 樂浪의 仙境이요 참으로 즐거운 나라이며 初月이란 산명은 곹 환희의 땅이라고 이를 만 하도다.
잘 세워서 모든 일이 두루 잘 되었고 부지런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우리나라를 크게 비호하여 위로 왕의 寶壽에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三千世界를 망라하여 네 경계를 삼으며 오백년을 셈하여 한 봄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山에서 표범을 사냥하여 바야흐로 꼬리세움을 기뻐하시다가 荊山에서 용을 걸터 다고 갑자기 덜어진 수염을 잡고 올 줄이야 어찌 기약하였겠습니까.
憲康大王께서는 젊은 나이에 이미 덕이 높으셨고 정신이 맑고 몸이 건강하여 우러러 寢門에서 환관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됨을 슬퍼하시고 머리 숙여 翼室에서 居喪하는 것을 준수하셨습니다. ▲나라 文公이 禮를 다하여 居喪함으로써 마침내 克己할 수 있었고 楚나라 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를 다스림으로써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거늘, 하물며 천성이 中華의 풍토를 따르시고 몸소 지혜의 이슬에 젖으시며 祖宗을 높이는 의리를 들어올리시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정성을 분발하셨음에랴.
中和 을사년(885) 가을에 하교하시기를,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아 잘 따르며 길이 후손에게 좋은 일을 물려주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先代에 세운 鵠寺의 명칭을 바꾸어 마땅히 大崇福이라 해야 할 것이다. 經을 몸에 지니는 보살과 寺務의 대강을 맡은 청정한 승려가 좋은 田地로써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였는데 한결같이 奉恩寺(봉은사는 聖德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의 전례를 따르라. 고 波珍湌 金元良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부터 얻는 이익을 운반하는 일이 중대하니 마땅히 政法司에 위임토록 하라. 그리고 따로 덕망이 있는 두 고승을 뽑아 寺籍에 올려 常住토록 하면서 冥路에 복을 드린다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 幽界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고 大緣을 맺은 이로서도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종소리는 공중에 울려 퍼지고 발우엔 香積如來가 주는 밥이 가득 담기며, 唱導함에 六時로 玉磬이 울리고 修持함에 萬劫 동안 구슬이 이어지듯 하리니, 위대하도다! 孔子의 이른바 “근심이 없는 이는 오직 文王일진저. 아비가 일으키고 아들이 이어받았구나” 하는 것을 얻으심이 아니겠습니까.
경사스러운 병오년(886) 봄에 下臣 致遠을 보고 이르시되, “禮記에 이르지 않았던가. ‘銘이란 스스로 이름함이니 그 조상의 덕을 칭송하여 후세에까지 밝게 드러내려는 것은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 라고. 先朝께서 절을 지으실 당초에 큰 誓願을 발하셨는데 金純行과 그대의 아비 肩逸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銘이 한벉 일컬어지면 과인과 그대가 모두 얻게 되리니 그대는 마땅히 銘을 짓도록 하라” 고 하셨습니다. 臣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月桂의 향기를 훔쳤지만 虞丘子의 긴 슬픔만 남겼고 季路의 헛된 영화만을 누릴 뿐이었는데, 王命을 받자오매 두렵고 놀라와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 목이 메입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중국에서 벼슬할 때 일찍이 柳子珪가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적어놓은 글을 읽으니 서술한 바가 바르고 조리가 있어 王道 아님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 國史를 읽어보니 완연히 聖德大王朝의 事跡이었습니다. 또 전하는 말을 들으매 중국의 사신 胡歸厚가 復命함에 한껏 채집한 風謠를 두고 당시의 재상에게 이르기를, “제가 다녀온 지금부터 武夫는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라에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신라왕이 시로써 그려내어 주시거늘 제가 일찍이 배웠던 것에 힘입어 韻語를 지음으로써 억지로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화답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海外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관리들이 옳다고 여겼다 하옵니다. 이는 오로지 烈祖께서 詩書禮樂으로 터전을 마련하시고 先王께서 六經으로 세속을 교화하심이니 어찌 후손을 위하여 그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능히 문물을 빛나게 하셨으니 銘을 지어도 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오 붓을 들어도 넘치는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감히 하늘을 엿보고 바닷물을 헤아려 비로소 평범한 말을 엮어 보았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별안간 한탄만이 일게 될 줄 뉘 알았겠습니까. 뒤미처 定康大王께서 남기신 숫돌에 공을 이루시니 부시던 篪에 韻이 맞으셨습니다. 이미 王位를 이으시어 王業을 지키시며 장차 남은 사업을 이어 이루시려고 그 지위에서 편한 날이 없으시어 그 글을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멀리 해같은 형님을 쫓으시다가 갑자기 西山에 그림자를 만나시니 높은 달같은 누이에게 의지하여 길이 海東에 빛을 전하셨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전하께서는 아름다운 꽃받침이 꽃과 이은 듯하고 왕가의 계통이 매우 밝으며 빼어난 坤德을 체득하고 아름다운 天倫을 계승하셨나니, 진실로 이른바 神珠를 품고 採石을 불린 것이어서 이지러진 데는 모두 기우고 좋은 일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寶雨經』에서 부처님 말씀으로 분명히 授記하신 것이라든지 『大雲經』에 나오는 옥같은 글이 완연히 부합됨과 같음을 얻으셨습니다.
先考 景文大王께서 절을 이룩하시고 憲康大王께서 스님들의 공양을 베푸시어 이미 불교계를 높이셨으나 아직 비문을 새기지 못하였기에 용렬한 臣에게 명을 내리시어 힘없는 붓을 놀리게 하셨는데, 신이 비록 못이 먹물로 변함에 부끄럽고 붓이 꿈속에서 서까래만함에 욕되오나, 張融이 두 王氏의 필법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은 것에 가만히 비할 것이오며, 曹操가 어저다 여덟자의 찬사를 풀이했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설령 제가 부딪쳐 못을 메우고 먼지가 날아 바다에 넘칠지라도 임금의 후예는 무성하여 若木과 나란히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두터운 비석은 빼어나 沃焦를 바라보며 우뚝 서있을 것입니다.
정성을 가다듬고 손 모아 절하며 눈물을 씻고 붓을 들어 빛나는 발자취를 더듬어 銘을 지어 올립니다.
迦毘羅의 부처님은 해돋는 곳의 태양이시라
西土에 나타나시고 東方에서 돋으셨구나
먼 곳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어 인연있는 자들이 크게 일어났네.
淨刹에 공이 높았고 왕릉에 복이 미치었도다.
열렬하신 英祖께서는 德業이 舜임금과 부합하셨으니
큰 숲에 드심이 무난하여 문득 천하를 얻었네.
우리의 자손을 보호하시고 백성들의 부모가 되옵시니
뿌리는 동방에 깊었고 갈래는 동해에 뻗었도다.
蜃紼과 龍▲으로 산릉에 편안히 모셨으며
幽宅에 隧道를 열고 솟은 탑을 이웃에 옮기셨도다.
오래도록 애모하는 禮는 모든 이의 깨끗한 인연일지니
절에 이로움이 많고 임금의 일족이 길이 번성하리라.
孝孫이 깊고 아름다워 천지의 이치를 밝게 아시매
봉황이 날고 용이 뛰니 金圭가 상서로움에 부합되었도다.
祖靈을 기원하매 어둡지 않고 바라던 복도 곧 이르니
그 은덕 갚으려고 불사를 잘 일으키셨네.
나라의 인걸 잘 뽑으시고 나라의 名工을 두터이 대하시며
농사철 아닌 때에 대처하여 부처의 궁전을 이룩하셨네.
채색 난간엔 봉황이 모이고 아로새긴 들보엔 무지개가 걸쳤으며
둘러싼 담장엔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림벽엔 노을이 엉키었구나.
터전이 시원스레 툭 트이고 눈에 드는 경치는 맑고 깨끗하다.
쪽빛 묏부리는 어울려 솟아 있고 맛좋은 샘물은 쉬지않고 솟아난다.
꽃이 아름다운 봄산이며 달이 높이 뜬 가을밤이 있으니
비록 해외에 있지만 천하에 홀로 빼어나구나.
陳에서는 報德에 힘 기울이고 隋에서는 興國을 외쳤네.
어찌 家福이라고만 하랴 국력을 높이심이라.
佛堂에선 미묘한 소리 드높고 주방에는 정결한 음식이 푸짐하다.
嗣君의 끼치신 덕와 만겁 동안 무궁하리라.
아름다울 손 여왕이시어! 孝悌의 정이 돈독하시도다.
雁行을 아름답게 이루시고 王者의 도를 삼가 훌륭하게 하셨도다.
글은 썩은 붓을 놀린 듯 부끄럽고 글씨는 팔목을 당긴 듯 수치스러우나
고래구렁이 비록 마를지라도 거북 위의 옥돌은 썩지 않으리라.
'짧은여정 긴호흡 > 답사가는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강따라-충주 청룡사터와 탑평리7층석탑(중앙탑), 월악산의 사자빈신사터와 미륵리절터 (0) | 2012.11.26 |
---|---|
남한강따라-법천사터와 거돈사터 (0) | 2012.11.25 |
남한강따라-흥법사터와 고달사터, 경지에 이르렀는가 (0) | 2011.11.07 |
남한강따라-영녕릉(세종능과 효종능) (0) | 2011.06.06 |
답날 답사 - <지리산의 기억>속으로 (0) | 2010.12.22 |